하디스(Hadith) 강의

말과 행동의 저울: 의도(意圖)

장후세인 2015. 4. 2. 11:18




우마르 븐 카따브(라디알라후 안후)가 전하는 하디스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마드(쌀랄라후 알라이히 와쌀람)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의도에 따라 모든 일의 가치가 결정되니, 모든 사람은 그가 의도한 바대로 얻을 것이니라. 만일 그가 이주한 의도가 알라와 그분의 예언자를 위한 것이라면 그는 그가 의도한 바대로 얻을 것이며, 그가 이주한 의도가 현세에서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거나 결혼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그가 의도한 바대로 얻을 것이니라.” (부카리와 무슬림이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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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여행 중 샘물을 발견하곤 휴식을 취하기 위에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샘물 근처에 말뚝을 박아 말의 고삐를 묶었습니다. 충분히 쉰 후 이제 다시 떠나려는 찰나에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이 말뚝은 나 이후에 올 사람이 말을 묶을 때 필요할지도 몰라.’

그래서 그는 말뚝을 그대로 놓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다른 여행자가 같은 샘물을 지날 때 발이 말뚝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나 이후에 다른 사람이 여기에 왔을 때 다치지 않도록 이 말뚝을 치워버려야겠다.’

그리고는 말뚝을 제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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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에 대해 한 이슬람학자는, 두 명의 여행자가 행한 행위는 모두 숭배행위이며 그로 인하여 둘 다 보상을 얻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로 앞서 언급된 하디스를 제시했습니다.

 

순수한 의도란, 어떤 일을 행할 때 그 마음이 알라의 만족을 얻기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 의도는 마음으로 행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 의도가 말과 다르다면 알라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라께서는 우리를 판단하실 때 우리의 의도 즉,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대부분의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판단을 내립니다. 만약 20명 정도가 예배드릴 수 있는 소박한 성원과 1,000명 정도가 예배드릴 수 있는 웅장한 성원 중 어떤 곳을 더 선호하냐고 질문 받는다면 대부분이 크고 웅장한 성원을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소박한 성원에 대해선 여러 가지 불편함과 불만족스러움을 표현하는 반면 큰 성원에 대해선 미나렛과 돔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시설 또한 얼마나 편리하게 잘 만들어졌는지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내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박하고 어쩌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성원을 누군가 만들었다면 크고 웅장한 성원을 만든 사람 보다 보상이 적을 거라 생각하지만 알라께서는 성원의 크기나 아름다운 모습에 상관없이 만든 사람의 의도를 보십니다.

 

누가 알라의 만족을 얻기 위해 뇌조(雷鳥)의 둥지 크기만큼의 성원을 짓는다면

알라께서는 그를 위해 천국에 대저택을 지으실 것이니라.” (Kutubus Sittah, 15316)

 

누군가 새둥지만큼 작은 크기의 성원에선 예배도 드릴 수 없고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지만 그의 마음이 알라를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의 의도는 바다만큼이나 큰 것입니다. 그런 의도를 가진 신앙인이라면 만약 그에게 어느 날 큰 성원을 지을 능력이 생긴다면 그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의도에 따라 모든 일의 가치가 결정됩니.’와 관련하여,

압둘라 이븐 압바스(라디알라후 안후)가 전하는 하디스에 의하면 알라의 말씀을 예언자 무함마드(쌀랄라후 알라이히 와쌀람)께서 다음과 같이 전하셨습니다.

 

알라께서는 선행과 악행을 기록하신 후 그것들에 대해 설명하시니:

선행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았을 때 알라께서는 그(그녀)를 위해

한 번의 완전한 선행으로 그것을 기록하시며,

선행을 하려고 마음먹고 그것을 행했을 때 알라께서는 그(그녀)를 위해

10배에서 700배 또는 그 이상의 선행으로 그것을 기록하시니라.

그러나 악행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았을 때 알라께서 그(그녀)를 위해 한 번의 완전한 선행으로 기록하시며,

악행을 하려고 마음먹고 그것을 행했을 때 알라께서는 그것을

한 번의 악행으로 기록하시니라.” (부카리와 무슬림이 전함)

 

무슬림의 모든 행동은 창조주이신 알라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순수한 의도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 외의 모든 의도는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의 하디스는 알라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의도 없이 순전히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자 한 행위가 알라 앞에서 무의미함을 잘 말해줍니다.

최후 심판의 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심판의 부름을 받게 될 자는 바로 순교자이니라. 알라께서는 그가 현세에서 그분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실 것이니라.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순교자로 죽을 때까지 당신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거짓된 행위를 하였느니라. 그대는 그대가 용감한 자라는 것을 알리고자 투쟁하였느니라. 그래서 그대는 그렇게 소문이 났느니라.’ 그 후 그에게는 그의 얼굴 그대로 불지옥으로 끌려가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느니라.

또 학문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꾸란을 읽은 사람이 있을 것이니라. 알라께서는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이니라.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학문을 배우고 그것을 가르치고 당신을 위해 꾸란을 읽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행위는 거짓이니라. 그대는 그대가 학자라는 것을 알리고자 학문을 공부하였고 그대가 꾸란을 읽는 자 라는 것을 알리고자 꾸란을 읽었느니라. 그래서 그대는 그렇게 소문이 났느니라.’ 그 후 그에게는 그의 얼굴 그대로 불지옥으로 끌려가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느니라.

알라로부터 재물을 부여받고서 자신의 모든 재물을 그분께 바친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니라. 알라께서는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이니라.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저의 재물이 당신을 위해 사용되는 것 외에 쓰일 여지를 남겨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행위는 거짓이니라. 그대는 그대가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그렇게 하였느니라. 그래서 그대는 그렇게 소문이 났느니라.’ 그 후 그에게도 그의 얼굴 그대로 불지옥으로 끌려가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느니라.”  (무슬림, 이마라 152)


위 하디스에 언급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겉으로는 훌륭한 행위를 행하였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여겼지만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한결같이 알라의 기쁨이 아닌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얼마나 열심히 드리고, 성지순례를 얼마나 훌륭하게 해냈고, 두아드릴 때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고,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등등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자하는 의도로 알라를 숭배하는 것은 죄입니다.

 

때로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의도에 따라 모든 일의 가치가 결정되니...라는 가르침을 임의로 해석하여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하여 유명한 이슬람학자 아부 하니파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좋은 의도는 나쁜 행위를 좋게 만들 수 없다.따라서 무슬림이 좋은 의도로 알라께서 금하신 어떤 것’(하람)을 저질렀다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 악행을 저지르기 위한 좋은 의도는 좋은 의도가 아닙니다. 좋은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알라께서 금하신 것을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좋은 의도로 도둑질하는 것, 도박을 하거나 로또를 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상을 숭배한 메카 불신자들도 자신들의 의도는 우상숭배를 통해 알라께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우상)만을 섬기고 있나니 그들이 우리를 알라 가까이로 데려다 주리라...꾸란 39(주마르):3

 

따라서 의도에 따라 모든 일의 가치가 결정되니라는 원칙은 알라께서 허락하신 행위를 행할 때만 적용됩니다.

 

만일 그의 이주 의도가 알라와 그분의 예언자를 위한 것이라면 그가 의도한 것을 얻을 것이며,에서 언급된 이주란 어떤 것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알라께서 금하신 것을 멀리하는 것 또한 이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언자(쌀랄라후 알라이히 와쌀람)께서는 무하지룬(이주자)이란 알라께서 금지하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는 자들을 일컫느니라.(부카리가 전함)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이주 목적이 현세에서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내세의 보상은 없을 것입니다. 알라께서 꾸란에 말씀하시기를,

알라께서는 내세를 위한 경작지를 원하는 자에게는 그의 경작지를 더하여 줄 것이며,

현세를 위한 경작지를 원하는 자에게는 그것의 일부를 주리라

그러나 내세에서 그에게는 아무런 몫이 없느니.” 꾸란 42(슈라):20


어떤 일을 위한 의도가 알라를 위한 것이었을 때 그는 그 일에 대한 보상을 현세와 내세에서 동시에 얻을 수 있지만 만약 그 의도가 알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행위는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되며 비록 그 행위를 통해 현세적 이익을 얻었다하더라도 내세에서의 영원한 이익은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세적 이익은 내세의 이익과는 다르게 언제든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모든 행위를 오직 알라를 위해 한다는 의도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신앙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주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위 하디스는 예언자(쌀랄라후 알라이히 와쌀람)께서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인하여 언급하신 것입니다. 한 교우가 움 까이스(Umm Qais)라는 이름의 여성에게 청혼을 했는데, 그녀는 그가 결혼을 목적으로 메디나에 이주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목적으로 이주하였고 그녀와 결혼하였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교우들이 그의 이주에 대해 보상을 얻을 행위인지 아닌지 논쟁하자 예언자(쌀랄라후 알라이히 와쌀람)께서 위 하디스를 통해 이에 대해 설명하시고 모든 인간은 의도에 따라 보상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도의 중요함에 대해 다음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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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교우 중 한 분이 가난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한 자루의 대추야자를 성원에 있는 자선금 놓는 기둥 앞에 놓았습니다. 그 때 그의 가난한 아들이 자선을 한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성원에 갔습니다. 성원에 간 그는 한 자루의 대차야자를 보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가난한 아들의 집을 찾아간 아버지가 한 자루의 대추야자를 아들의 집에서 발견하고는 그것을 어디서 구했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이 성원에서 가져왔다고 하자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 그 대추야자를 자신이 갖다놓았으니 그것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둘 사이에 논쟁이 시작되었고 결국 예언자에게 가서 해결방법을 찾자고 했습니다. 예언자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후 먼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자선에 대한 보상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슬퍼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당신의 의도는 그것을 가난한 사람이 가져가기를 원한 것이었기 때문이오.” 그 다음 가난한 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난하기 때문에 이 대추야자를 가져갈 권리가 있으니 이 대추야자를 가져가도 괜찮으니라.”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추야자를 (아들이 아니라 다른) 가난한 사람이 가져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의도가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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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의도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그 결과나 성과에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알라께서는 우리의 순수한 의도만으로 우리를 판단하시니 그것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순수하고 진실한 의도 때문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일들은 한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그 의도만큼은 순수하게 알라를 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습니다. 알라의 저울은 인간이 생각하는 저울과 다릅니다. 알라께 중요한 행위는 오직 그분을 위한 진실한 의도가 담긴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