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 정수일씨의 저서 “이슬람문명”에서 옮겼습니다.-
공예기술 면에서도 이슬람 문명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도자기의 청색안료인 회청(回靑, 혹은 회회청, Muslim blue)의 도입이다. 원래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한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지역에서 산출되던 이 안료는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중국과 한국(조선조)에 수출되었다. 이 새로운 안료로 인해 15~16세기경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청색무늬를 넣은 독특한 청화백자(靑華白瓷)가 출현했다. 조선조에서는 백자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세조 때 중국으로부터 회청이 들어오자 화려한 청화백자가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료 수입이 어려워 생산량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국내산 안료가 개발됨에 따라 청화백자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여말선초에 위구르 문자와 언어가 상층 사회에서 사용된 사실은 이슬람 문명과의 교류에서 특기할 사항이다. 일찍이 문자가 없었던 몽골은 위구르 문자를 빌려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함과 동시에 위구르어를 공식어로 채택하여 널리 통용되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후기 고려로의 위구르어 침투를 유발했다. 고려에 대한 몽골의 간섭이 극심하던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엽까지 회회어와 회회문으로 알려진 위구르어와 문자는 고려 상층부에서 각광 받았으며 비공식 궁중용어로까지 둔갑했다. 그리하여 위구르어는 공식 외국어로 교습되고 사역원(司譯院)의 번역관 고시에는 몽골어와 더불어 필수 시험과목으로 지목되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까지 위력적으로 사용되던 위구르어는 1427년에 공포된 ‘외래습속금령’으로 인해 외방적 복식 및 의례형식과 함께 점차 자취를 감췄다.
비록 이 모든 것은 이슬람 문명권의 언저리에서 일어난 일들이지만 권내 무슬림들의 관심 밖에 있을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에 관한 기록을 남긴 무슬림학자는 오스만터키 출신의 알리 아크바르(Ali Akbar)다. 그는 1500년대 초 오아시스 육로로 호탄(현 중국 위구르 자치주 남부의 화기)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고 나서 1516년에 페르시아어로 중국 여행기《키타이서》를 저술했는데, 그 속에서 한국에 관해 약간 언급했다. 저술시기는 조선 시대이지만 그 내용은 고려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여행기에서 카올리(Kao-li), 즉 고려는 12개 행정구역의 하나(제9구역)로서 소규모의 영세상인들조차도 굉장히 부유한 지역이며, 그 곳에서 생산되는 아마포는 품질이 우수하여 여러 상품들을 구입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전대의 라쉬둣 딘의 고려 관련 기술 내용과 비슷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시대, 특히 그 말엽부터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 동안 진행된 이슬람과의 만남은 여러모로 상승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에 밀려 이러한 상승세에 제동이 걸려 급기야 그 후 수세기간의 단절기, 공백기를 겪게 되었다. 우선 대외적으로 그간 한국에 대한 이슬람의 ‘공급원’ 역할을 해오던 원나라가 망하고, 한국에 대한 이슬람의 ‘관문’ 역할을 해오던 중국이 해금(海禁). 관금(關禁) 등 대외폐쇄정책을 실시(명조)한 데 이어 무슬림들에 대한 심한탄압정책을 자행(청조)하였으며, 이에 더해 서세동점의 새로운 국제정세 하에서 무슬림들이 제해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모든 객관적 정세로 인하여 이슬람의 동방 진출이 전반적으로 퇴조되고 한반도로의 이슬람 유입 루트가 소멸 · 차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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