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 정수일씨의 저서 “이슬람문명”에서 옮겼습니다.-
고려시대는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의 역사에서 새 장이 열린 시대다. 이 시대의 초엽에는 아랍 상인들이 대거 몰려왔고, 말엽에는 주로 이슬람을 적극 수용하고 십분 활용한 원제국(몽골)을 통해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영내에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나마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 문헌, 특히 한적(韓籍)에 의해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사적을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나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에 관한 기사가 간간이 보인다. 모두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들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1024년과 1025년, 1040년에 열라자(悅羅慈).하선(夏詵).보나합(保那盒)을 비롯한 아랍 상인들이 100여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수은.몰약(沒藥).소목(蘇木) 같은 방물을 가지고 상역차 개경에 찾아왔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객관까지 마련하여 후대하고, 돌아갈 때는 금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동방예의지국다운 처사이며, 두 이질문명간의 화목한 만남이다.
고려말에 이르러서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는데, 그것은 호한(浩澣)한 몽골초원에서 달려온 기마유목민과 통칭 ‘색목인(色目人)’이라는 그들의 ‘문화교수(Professeurs de civilization)인 서역 무슬림들이 주도하였다. 원제국에서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제국의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슬람이란 이질적 문명이 그 신봉자도 아닌, 그저 이용자일 뿐인 이방의 북방 기마유목민의 등에 업혀 반입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에는 역설적인 사변이 침묵을 깨는 일이 가끔 있다.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의 특수한 입지를 갖고 있던 무슬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원제국의 고려 경략에 동참하여 사신.역관.서기.근위병.시종무관 등 여러 직분으로 고려에 공식 파견되었다. 그밖에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에 왔다. 그들 중에는 이러저라한 이유로 고려에 잔류하여 귀화하고 동화한 자들도 있었다. 이 무슬림들, 특히 귀화무슬림들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의 비조가 되고 이슬람의 정초자가 되었다. 그 대표적 일례가 무슬림인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다.
삼가는 1274년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몽골비(妃)인 제국(濟國) 공주(원 세조의 딸)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 원래 삼가는 원나라에 있을 때도 고관직을 제수받은 인물로, 비록 공주의 겁령구(怯怜口, 즉 사속인 私屬人)로 고려에 왔지만 곧바로 벼슬이 낭장(郎將)에서 장군을 거쳐 첨의참리(僉議叅理)까지 올랐다. 그는 덕수현(德水縣, 현 북한 개성직할시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고려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남기고 44세에 별세하였는데, 후손들은 본관을 덕수로 하고 그를 덕수 장씨의 시조로 모셨다. 충렬왕이 충선왕(忠宣王)에게 선위(禪位)하고 순룡의 자택에 이사와서 기거하며 그 집을 덕자궁(德慈宮)으로 불렀다고 하니, 순룡에 대한 왕의 두터운 신임과 그가 누렸을 권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12종파 25대로 이어져 내려온 덕수 장씨의 문중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많은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순룡의 맏아들 양(良)은 판사(判事)를 지냈고, 8대손인 정(挺)은 연산군 때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했다. 특히 12세손인 장유(張維)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우의정까지 올라 명성을 날렸으며, [계곡집(谿谷集)]같은 명문집을 남겼다. 지금도 명문대가로 그 후예들이 선조의 종묘가 모셔져 있는 평택(平澤)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삼가의 귀화 후 일족의 신앙상황은 밝혀진 바 없으나, 적어도 몇 세대까지는 무슬림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덕수 장씨의 후예들은 남판에만 총 4,554가구에 1만 9,366명이 살고 있다.
무슬림으로 고려 충렬왕 때 귀화하여 서임된 이로는 삼가 외에 민보(閔甫)가 있다. 벼슬이 대장에까지 이른 그는 매를 가지고 다섯 번이나 원나라에 사행하고 충선왕 때에는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존무사(存撫使)를 겸하기도 하였다. 삼가나 민보보다는 좀 뒤늦게 고려로 와 귀하하고 관직에 있었던 무슬림으로는 경주 설씨(楔氏)의 시조인 회골(回鶻, 위구르) 출신의 설손(偰遜)이 있다. 원래 그는 원나라 순제 때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칠 정도로 문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방에 좌천되자 교분이 있던 공민왕을 찾아 고려로 와서는 봉후(封侯, 부원후 富原侯)되고 전답까지 하사받았으며 고려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설씨 일가는 여말선초의 명문가로서 조선조 개국시 명나라에 여덟 차례나 사행한 장자 장수(長壽)를 비롯해 여러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태조 때 장수가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지자 계림(鷄林)을 사적(賜籍)받아 본관을 경주로 정했다. 경제기획원의 같은 조사에 따르면, 현재 경주 설씨는 남판에 총 442가구에 인구 1,952명이 살고 있다. 설씨 일가와 비슷한 경륜을 가진 가문으로는 임천(林川) 이씨가 있었다.
이와 같이 몽골 통치시기에 ‘준몽골인’으로 고려를 찾은 무슬림들, 특히 귀화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전파와 정착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회에서 상당한 권력도 행사하였다. 회회인들은 신전(新殿)에서 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때때로 왕을 자신들의 연회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은 피륙을 회회가에 나누어주어 그 이익을 취하게 하였으며, 매일 그들로부터 15근의 쇠고기를 상납받았다. 몽골풍에 젖은 우왕(禑王)은 한 무슬림 가정의 아들과 딸을 데려다가 시종케 하였으며, 매를 관리하는 응방(鷹坊)에는 많은 무슬림들이 근무하고 있었다고 하니, 언필칭 서로의 친밀함이요, 이슬람에 대한 공허(公許)라 아니할 수 없다.
이즈음에 고려의 개경에는 이미 무슬림들의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어 하나의 사회경제적 세력으로서 고려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에 이르는 약 150년간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무슬림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에서 취락을 이루고 집단거주하며 고유의 생활양식과 종교의식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이슬람 성원 격인 ‘예궁(禮宮)’에서 예배를 근행하고 회회사문(이맘)의 인도하에 이슬람의 예배의식인 ‘대조회송축(大朝會頌祝)’을 조정에서 거행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려왕실 주변에는 봉군(封君)까지 된 색목인 출신의 최노성(崔老星)같은 호상도 다수 있었다.
이제 무슬림들이 고려사회에 어지간히 적응하여 ‘고려화’되다 보니, 당시 유행하던 풍자가사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하게 된다. 26각(刻)의 곡조로 된 속요(俗謠) [쌍화점(雙花店)]이 그 일례다. 이 속요는 4절로 되어 있는데, 그 첫 절이 회회남자와 고려여인 간의 로맨스 이야기다. 그 내용을 요즘 말로 풀이하면 이렇다.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았다. 이 소문이 상점 밖으로 퍼진다면 조그마한 새끼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
이를 두고 혹자는 퇴폐적인 사회상의 단면이라고 혹평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질적인 두 문명의 만남이다. 두 문명이 세진(世塵) 속에서 융합되다 보니 마침내 인간 본능적인 사랑과 낭만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서의 “쌍화‘는 상화(霜花)떡으로 무슬림들 고유의 빵(만두)인 듯하다. 무슬림들의 도래와 더불어 그들의 음식문화도 들어온 것이다. 다른 실례로 송도 설씨(薛氏)가 만든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적(薛炙)은 쇠고기나 소의 내장을 고명하여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인데, 오늘날까지 유행하고 있는 중동의 케밥이나 동남아의 사떼와 흡사하다.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은 주로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역사적 배경에서 어찌 보면 단향적(單向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만남이었기에 이슬람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 수박에 없었다. 따라서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심각해 후대인 조선시대와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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