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한국이슬람학회논총(2007), 제 17-1집, 이희수 박사의 논문 “중국 광저우에서 발견한 고려인 라마단 비문에 대한 한 해석(63-80쪽)”에서 발췌했습니다.-
2. 국제교역의 주도자 그룹으로서의 무슬림 라마단
라마단이 주로 국제교역에 참여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다는 점을 유념할 때, 13-4세기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남부와의 국제교역을 담당하던 이슬람계 상인그룹과의 불가분의 연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국제교역의 경험과 정보를 가진 집단은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위구르 투르크계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은 몽골조정의 가장 신뢰할 만한 경제관료로서 나아가 민간 무역상인으로 원나라 전시기를 통해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나라 조정이 있던 대도에서 거주하면서 중국 동남부 해안의 국제교역망을 넘나들던 라마단을 개종한 고려인으로 보는 견해보다는 이미 고려사회에 정착해서 국제교역을 담당하던 무슬림으로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3. “고려인 라마단”의 국가정체성
국경 없는 시대 무슬림들의 국가정체성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지역을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구르 제국이나 압바스 아랍제국의 멸망 이후 뚜렷한 국가 소속감 없이 실크로드를 장악하며 국제교역 종사하던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상인들은 자신이 자리를 잡고 정착한 곳을 자신들의 공간 정체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고려인 라마단이라는 것도 고려인 자체를 강조하는 것 보다는 고려에 정착해 살던 무슬림으로 보여 진다. 설사 그가 개종한 무슬림이라 해도 고려식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무슬림 이름만으로 기록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이례적이다. 무슬림들 중에는 고위관료로서 고려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일부 인사가 왕의 특별 배려로 봉토와 사성을 받고 고려로 귀화한 경우도 흔하게 나타난다. 무슬림 삼가에서 귀화한 장순룡, 민보, 위구르인 설손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슬림 상인집단과 종교지도자들은 고려조정의 다문화 포영정책과 원대 준지배층으로 고려사회에 정착한 무슬림들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종교적 압박을 거의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은 이능화의 표현대로 집단 공동체를 형성하며 고유한 복장과 언어를 사용하면 1427년 조선초기 이민족 문화의 지속을 금한 칙령 때까지 고유한 중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나갔다.(李能和 1918: 605). 무엇보다 원 간섭하의 고려인들이 더 높은 신분 상승과 출세를 위해 고려 왕들의 경우처럼 자신의 이름을 오히려 몽골식 이름으로 바꾸는 시대적 상황에서, 고려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라마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루가치라는 원나라의 고위관직을 차지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따라서 당시 이미 100여년 이상 고려에 집단으로 거주해 정착해 살던 이주 무슬림들을 고려인 무슬림으로 불렀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4. 북경에서 광저우로
고려출신 무슬림 라마단이 몽골 조정이 있는 북경에 머물면서 국제 교역의 중심도시인 광저우 사이를 오갔던 것은 그가 이미 단단한 무슬림 동족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당시 <아라비아- 인도- 중국 동남부> 해안을 잇는 남해무역은 7세기 이후 14세기까지도 거의 완전히 이슬람 상인 출신들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서 장사를 하고 싶어하는 고려인 무슬림 라마단도 필연적으로 이슬람 상인들의 거점 도시인 광저우를 방문해야 했을 것이다. 더욱이 광저우는 단순한 국제교역의 중심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무슬림들을 위한 성지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지순례를 하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도 함께 지닌 것으로 보여 진다. 정교일치적 이슬람 공동체의 특성상 교역 파트너인 동족 무슬림들과 예배, 단식 같은 종교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족이 묻혀있는 동아시아 최대의 성지를 참배하는 것은 무슬림 신앙생활의 기본적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병을 얻어 광저우에서 죽었을 때, 동족으로서 종교적 형제로서 다루가치라는 상당한 지체를 유지하던 라마단을 가장 고귀한 이슬람 묘역에 안치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묘비에도 고위관료의 경우, 그의 출신성분을 자세하게 명기하는 관례에 따라, 특히 부계전통이 강한 무슬림 사회의 특징에 따라 그의 아버지 이름까지 밝히면서 고려출신 무슬림 라마단으로 그의 존재를 남겨 기렸던 것으로 보인다.
Ⅵ. 결론
무슬림 라마단은 고려 말 고려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활발한 정치-경제적 활동을 하던 무슬림 상인집단 출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아랍-페르시아계 상인집단들과 긴밀한 해상교류를 가져왔던 한반도는 이미 열려있는 동아시아의 중요한 국제교역의 파트너였다. 이러한 국제적 성격은 고려 초기까지 계속되어 고려 현종 시기에 대규모의 아랍 상인 사절단이 빈번히 내왕했다는 우리기록으로도 이미 확인되었다. 8세기에서 13세기초까지 계속된 해상을 통한 교류와 거래는 13세기말 몽골의 고려침공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몽골제국의 국제교역망 확충과 안전성 보장으로 유통비용이 현저히 줄어든 상황에서 해로보다는 육상 실크로드가 각광을 받으면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국제교역을 장악하고 있던 위구르계 무슬림 상인 집단들이 새롭게 한반도에 등정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몽골 지배층과 함께 고려내에서 준지배층을 이루면서, 오랜 국제교역의 경험과 동족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도 남다른 수완을 보였다.
고려인 라마단은 이 시기 중앙아시아 상인 집단의 일원으로 국제교역에 종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에 성공한 전형적인 인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인 접근이 아닐까? 아버지 이름은 알라우딘과 라마단 모두가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투르크-페르시아계 이름이라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당시 지방행정의 통치자였던 다루가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재정과 세금 업무였기 때문에, 국제상인으로서의 경륜을 가진 라마단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으로 보여진다. 북경에서 살면서 해상교역의 오충지인 광서지방의 다루가치였고, 당시 이슬람 교역공동체의 중심이요 성지였던 광저우에서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그의 신분은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개종한 고려인 무슬림으로 보기 보다는 고려출신 중앙아시아 무슬림 이주자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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