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장후세인 선생

장 후세인: 더 큰 이해를 위해 목소리를 내다

장후세인 2015. 12. 11. 09:44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계간지) "코리아나"(Koreana) 2015년 겨울호, 제29권 4호



터키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귀화해서 장후세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후세인 크르데미리. 그를 직접 만나 보면 따뜻할 뿐 아니라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한국에 살면서 사람들의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 맞서고 있다. 장후세인은 오랫동안 번역가, 작가, 강사로 일하다가 2012년에 자신의 출판사를 세웠다. 이름은 젠나무민출판사. 그는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교를 좀 더 깊이 이해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많은 무슬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고, 마음이 아주 따뜻하고 개방적인 사람들입니다. 출판을 통해 양쪽 사회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텔레비전은 이슬람교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매체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인생의 중반기에 고향을 떠나 지구 반대편의 낯선 곳에 자리 잡고 살아간다. 장 후세인의 경우가 그렇다. 터키 중심부의 작은 도시 요즈가트에서 자란 그는 앙카라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 “제 아버님은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터키군에 복무 중이셨어요. 그래서 한국전쟁에 지원했는데 당시에는 키가 큰 병사만 뽑아서 한국에 보냈기 때문에 키가 작은 제 아버지는 뽑히지 못하셨죠.”라고 말한다.
장 후세인은 자라면서 동아시아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관심은 성인이 되어서 불교와 유교, 영화를 통해 더욱 확장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가지 못했던 나라였던 한국을 찾아가 보고 싶게 만들었어요.”
그의 한국어를 배웠고 1994년 졸업 후 9개월 간 서울대학교 한국어 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어권 학습자에게 한국어는 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터키 사람에게는 쉽죠. 터키어의 어순이 한국어와 똑같거든요. 물론, 한자와 방언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렇지만 저랑 함께 공부한 미국인 학생들보다는 훨씬 쉬웠지요.”
그 과정이 끝나고 장 후세인은 석사과정을 시작했고 이어서 한국어과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제 그의 한국어는 놀랄 만큼 유창하다.

한국에 대한 초기 인상
1990년대 중반의 한국은 지금과 아주 달랐다. “제가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에 외국인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외국인이면 모두 미국인이라고 생각했죠. 저를 보고도 ‘오, 저기 미국사람이다’라고 말하곤 했어요.”
무슬림이고 소수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편견을 가지고 대했다. 그때에도 한국에 무슬림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적었죠. 그 당시 한국 친구들에게 라마단 기간에 단식을 한다고 말하면 이해를 못했어요. 제가 다이어트를 하거나 음식을 사먹을 돈이 없다고 생각했지요.”(웃음)
그는 처음 한국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한국이 눈에 띄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는 이태원에 가거나 시장에 가면 어디서나 무슬림을 볼 수 있어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할랄 음식을 파는 식당이 서울에 두 군데밖에 없었죠. 지금은 아주 많아요. 큰 프랜차이즈 슈퍼마켓에서 할랄 표시가 된 식재료를 살 수도 있고요.”
그가 한국에서 받은 첫인상은 여전하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열정이 아주 많아요. 자신의 야망을 끝까지 추구하고 포기하지 않죠. 전 그런 모습을 아주 존경합니다.”
그는 또한 한국 사람들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고 말한다. “작년에 비가 많이 온 어느 날 우산이 없어 당황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길 건너편의 한 여성이 저를 위해 어딘가에 가서 비닐봉지를 구해 왔어요. 제가 젖지 않도록 배려한 거죠. 외국인에게 베푼 온정에 정말 감동했어요.”라고 말하며 그는 회상에 잠겼다.
“약간 비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인들은 외면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부유해 보이는지,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등등. 사람들을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이곳에서 살아온 긴 시간 동안에도 한국인의 이런 경향은 정말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그는 덧붙였다.

이슬람을 위한 목소리
2000년대 초, 그가 제2의 조국으로 선택한 한국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킨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과 터키가 준결승전에서 맞붙은 것을 계기로 두 나라가 서로의 문화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터키가 한국전쟁 참전국이라는 사실이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불행한 일이지만 2001년 9.11 테러 공격으로 인해 갑자기 이슬람교와 중동 국가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행한 연유이긴 했지만 9.11 이후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났습니다.”라고 장 후세인은 말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말레이시아나 터키 같은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이슬람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이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슬람교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도 이즈음이었다. “교보문고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한국어 책을 찾아봤어요. 그런데 제가 찾은 책들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정보가 잘못되어 있었어요. 대부분 무슬림이 아닌 학자들이 쓴 책이었고 그래서 이슬람교의 다면성과 정신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많은 책에서 오류를 발견한 장 후세인은 답답해졌다. 이슬람에 대한 유명한 책마저도 자카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싣고 있었다. 자카트는 무슬림이 자선을 목적으로 자신의 연 수입 중 2.5 퍼센트를 기부하는 의무를 말한다. 그런데 책에서는 25퍼센트로 잘못 적혀 있었다. “이런 오류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아무리 의도적이 아니라고 해도요.”
“뉴욕에 있는 친구 하나가 저에게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한 이해》라는 책을 보여줬어요. 문답 형식의 책이고, 사진이 많이 실렸는데 이슬람교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어요.” 이 책이 한국인들에게 이슬람교를 소개하는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 장 후세인은 한국어로 번역했다. “1쇄, 2쇄가 팔려 나가고 지금은 6쇄까지 찍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정말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 뒤 다른 책도 번역하라는 친구들의 제안으로 그는 지금까지 20권 이상을 번역하고 출간했다.

제2의 조국에 뿌리를 내리다
그러는 동안 장 후세인의 삶에 또 다른,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9.11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름다운 이슬람교》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었어요. 터키 친구 한 명이 잡지 내용을 담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어요. 그 당시에 뉴욕에서 공부하던, 이슬람교로 개종한 한국인 여자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그녀는 이슬람교에 대한 한국어로 된 정보를 찾다가 제 사이트를 발견한 거죠.” 장 후세인과 윤은노 알리야는 활발하게 이메일 교류를 시작했고, 그녀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직접 만났다. “몇 번 만나고 나서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어요. 운명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녀는 제가 찾고 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2004년에 결혼식을 하고 딸 젠나(9세)와 아들 무민(6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
2000년대 중반에 장 후세인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로 결정했다. “저는 한국에 아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터키에 돌아가면 가족을 제외하곤 얘기 나눌 사람이 없어요. 그곳에 속하지 않은 느낌을 받아요. 이곳에는 친구도 있고 의미 있는 일도 있지만 터키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국적취득 과정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시민자격 시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어요. 그런데 제 신청서를 보고는 시험을 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이었죠. 저는 애국가도 외웠어요. 한국어 실력이 뛰어난 어떤 미국인이 다른 시험에서는 다 통과했는데 애국가를 외우지 못해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웃음). 10년이 더 지났지만 장 후세인은 자신의 결정에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소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 후세인은 이슬람교에 대해 교육하는 일에 점점 더 관여하게 되었다. 2005년부터는 이슬람교서울중앙성원에서 출판영업 대표로 일했다. 그곳에서 책을 번역하고 강의하는 일 외에도 홈페이지 관리와 주마다 발행되는 뉴스레터도 담당했다. 하지만 5년 반이 지난 후 책을 내는 일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너무 바빠서 번역 일을 늘 미뤄둬야 했어요. 그래서 결국 일을 그만두기로 했지요.”
그렇게 해서 그는 2012년 자신의 두 아이 이름을 딴 젠나무민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게 된다(www.jannahmuminbooks.com). 파주 책도시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출판사는 세 종류의 책에 주력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을 겨냥한 책들. 아이들을 위한 이슬람교에 대한 책. 그리고 일반인들이 이슬람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다.
최근에 출간된 책으로는 《이슬람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2012), 입문서격인 《이슬람》(2013), 《이맘 나와위의 하디스 40선과 해설》(2014), 《한국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궁금해 하는 40가지》(2014)가 있다. 한편, 아이들을 위해서 장 후세인의 아내 윤은노 알리야는 그림책 《이스탄불에서 길을 잃다 - 젠나와 무민의 이야기》(2013)를 만들었다. 장 후세인은 책이 꾸준히 팔린다고 말한다. 그런대로 유지가 가능한 사업 모델인 셈이다.
장후세인이 발간한 책들은 널리 알려졌다. “올해 8월에 처음 열리는 할랄 엑스포 코리아 조직위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이슬람교에 대한 책들을 소개하는 부스를 포함하고 싶다고요. 그 뒤에 다른 할랄 엑스포가 9월에 열렸는데 그곳에도 참여를 했어요. 이 책들이 얼마나 유용한지 느끼게 되었어요.”
한국 정부에서도 그의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과 이슬람 문화 간 교류를 진작하기 위해 개최된 2014년 이프타(Iftar) 디너에서는 윤병세 외교통상부 장관이 환영사에서 장 후세인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해의 필요성
현재 약 13만 명의 무슬림이 한국에 살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인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고 외국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있다. 한국이 점점 더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좀 더 잘 알아야 할 현실적, 사회적 이유가 생긴 것이다.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무슬림입니다. 외국과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무슬림 문화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그는 조언한다.
그는 또한 이슬람교가 사회 문제와 개인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교는 당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엄격하기만 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이슬람국가(IS)의 출현은 여러 면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의 수준을 저하시켰다. “매체로부터 사람들은 이슬람교가 이상하고 폭력적인 종교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들이 이슬람교의 대표자인양 소개되지요. 하지만 보통의 무슬림들은 그런 사람들을 이슬람교의 일원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아요.”라고 그는 강조한다.
“많은 무슬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고, 마음이 아주 따뜻하고 개방적인 사람들입니다. 출판을 통해 양쪽 사회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텔레비전은 이슬람교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매체가 아닙니다.”


출처: http://www.koreana.or.kr/months/news_view.asp?b_idx=4552&lang=ko&page_type=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