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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의 눈에 비친 신라-I

장후세인 2013. 1. 23. 21:16

-아래의 내용은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 정수일씨의 “향토와 문화”라는 글에서 옮겼습니다.-

 

 

이웃인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우리와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 동안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 사람들이 우리더러 ‘은둔의 나라’사람이라고 하니 우리는 그런가 보다하고 무심히 넘겨 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해답은 중세 아랍인들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4년 경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 황제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W.Rubruck)가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카우레’라고 한마디 언급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더 세스페데스(G. de Cespedes)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이며,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프리기트선 오우베르케르크호(Ouwerkerck, 승선원 3명)가 한국 해역에 나타난 최초의 이양선(異樣船, 서양 배)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 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 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 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구의 동쪽 끝, 신라를 알아낸 아랍사람들

아랍인들은 지구상에서 신라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일찌감치 제대로 알아냈다. 신라의 위치와 관련하여 첫 기록을 남긴 사람은 술라이만이다. 그 는 상인으로서 중국과 인도에 여러 차례 행상하면서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고 습득한 지식을 견문기《중국과 인도 소식》(851년)에 엮어 넣었다. 그는 이 책에서“(중국의) 바다 다음에는 신라 도서(島嶼)가 있다.”고 신라의 지리적 위치를 밝혔다. 술라이만에 이어 중세 아랍 역사학의 태두이며 지리학자인 마스오디(965년)도 그의 세계역사서《황금초원과 보석광》에서“중국 다음의 바닷가에는 신라와 그의 섬들을 제외하고는 알려지거나 기술된 왕국이라곤 없다.”, “육지의 거주지역 동단(東端)은 중국과 신라국의 맨 끝이다.”라고 신라가 중국의 동쪽, 육지의 맨 끝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10세기까지 아랍학자들은 신라를 중국의 동쪽, 지구의 맨 끝에 위치한 나라로 보았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지리관념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부한 것이다. 지리학에서의 엄청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10세기 이후 이슬람제국의 전성기를 맞아 아랍인들의 대동방 교역과 여행이 한층 더 활발해짐에 따라 신라에 관한 지리지식은 보다 깊어졌다. 특히 12세기 초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1099~1166)에 의해 위도와 경도가 명시된 세계지도가 제작된 후 아랍 지리학자들은 신라의 지리적 위치에 관해 보다 구체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지리학자 이불 피다(1273~1331)인데, 그는 신라를 중국의 동편, 동경 170도, 북위 5도 상에 위치한 섬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지적한 이 경도와 위도에 따른 신라의 위치는 현재 실제의 동경(124~130도)과 북위(33~42도)와는 다소 오차가 있다. 즉, 실제 위치보다 더 동쪽에, 더 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중국의 남단으로부터 동쪽으로 항해한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의해 그 수치가 추산된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아 그가 신라를 중국의 동쪽에 있다고 본 것은 정확하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중세 아랍문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첫째로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둘째로 신라가 바다(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는 것이다.

 

신라의 위치와 더불어 그 지형에 관해서는 섬과 산이 많다고 하는 것이 일치한 견해이다. 이드리시는《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이란 유명한 지리서에 첨부한 세계지도에서 신라를 중국의 동남해안에 있는 여러 개의 섬나라로 명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벨호(B.Velho) 세계지도(1562)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기입된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황금이 넘쳐나는 땅, 신라를 동경한 이들

‘사막의 아들’로부터 일약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 아랍인들은 무덥고 메마른 사막은 물론이거니와 풍랑 사나운 바다생활에도 더 이상 안주할 수가 없었다. 산명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그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들은 신라에 관한 생생한 기술을 남겨 놓게 하였다.

 

우선 기술자들은 한결같이 신라의 쾌적한 자연환경을 지적하였다.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마끄디시는 966년에 지은 저서《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신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기술자들은 신라에 금을 비롯한 귀중한 보석과 지하자원이 넉넉함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리학자인 디마스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신라) 군도는 여러 가지 종류의 강옥(鋼玉)과 귀중한 보석으로 충만한 좋은 지층을 가지고 있다. … 중국의 하부를 지나서 동쪽 바다에는 신라군도 라는 여섯 개의 큰 섬이 있다. 그곳에는 강옥과 귀중한 보석이 광산과 지하광 및 강바닥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의 지하자원에서 특히 아랍인들의 주목을 끈 것은 풍부한 황금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문자 그대로‘황금의 나라’였다. 만인이 그토록 선호하고 귀중히 여기며, 또 그것을 얻기 위해 천신만고를 마다하지 않는 황금이 여기 신라 땅에서는 개의 쇠사슬로부터 가옥의 단장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쓰이고 있으니, 실로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앞에서 말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신라의 황금 다산상을 격찬하여 사람들의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한 바 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신라에 금이 많다는 것은 거의 모든 신라 관계 기술자들의 일치된 지적사항이다. 그들이 신라에 금이 많이 난다고 한 것은 지하자원으로서의 자연금이 많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용도를 위해 가공된 금제품이 풍부하고, 그 공예술 수준이 또한 높다는 것도 아울러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듯 지리학자 마끄디시는 산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에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