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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기록에 나타난 신라-III

장후세인 2013. 1. 22. 22:37

-아래의 내용은 바다의 실크로드(2003), 이희수 박사의 논문 “걸프 해에서 경주까지, 천년의 만남(256-290쪽)”에서 발췌했습니다.-

 

무슬림이 남긴 문화유산

이슬람 상인들의 해상을 통한 활발한 교류는 통일신라에 전성기를 이루며 고려 중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바다의 파고는 그러나 1259년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 잠잠해지고 대신 육상 실크로드의 전성기가 열리면서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이 한반도로 몰려오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중앙아시아 위구르-투르크계로 추정되는 무슬림(회회인)들은, 몽골이 고려를 침공할 때는 몽골군의 일원으로 후일 원나라 지배 아래서는 몽골 관리, 역관(譯官), 서기(書記), 시종무관(侍從武官) 등의 직책을 가진 준지배 세력으로서 한반도에 유입, 정착했다. 그들은 고려 조정의 벼슬을 얻거나, 몽골 공주의 후원을 배경으로 권세를 누렸으나, 점차 고려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동화되어 갔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몽골여인 제국공주(齊國公主)의 시종으로 따라온 삼가(三哥)라는 무슬림의 경우이다. 그의 부친 경(卿)은 원나라 세조를 섬겨 서기가 되었고, 삼가는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고려에 귀화했다. 그는 왕에게서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을 받고, 벼슬이 장군에 이르렀다. 현재 덕수 장씨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가 아랍계 무슬림이라는 종래의 주장과는 달리, 중앙아시아 위구르-투르크계 무슬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에 거주하던 무슬림 회회인들은 왕실과 특수관계를 유지하며 경제적 활동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자신들의 고유한 습속, 언어, 종교 등을 보존하면서 개성 및 인근 도시에 자치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고려가 망한 후 조선 초기까지도 집단생활을 하며, 고유한 전통복장을 입고, 종교의식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슬림 지도자들은 궁중 하례의식에 참석하여 꾸란 낭송이나 이슬람식 기도로 국가의 안녕과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15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종교적 자치권과 민족적 정체성은 1427년에 발효한 왕의 칙령으로 금지되고 만다.

 

 

예조가 아뢰기를 “회회의 무리가 의관이 달라,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바, 이미 우리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 의관을 좇아 차이를 없애야만 자연 혼인하게 될 것이다... 또 회회인들이 대조회(大朝會) 때 송축하는 예도 폐지하십시오” 하니 이를 승낙하셨다. (<세종실록> 9년 4월)

 

 

이 칙령 이후 무슬림들의 종교적, 민족적 동질성은 와해되고, 급속한 동화 단계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국내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기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슬람권과의 접촉 결과, 부분적인 이슬람 문화가 한반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헤지라력으로 알려진 순태음력인 이슬람역법(回回曆法)의 도입이다. 세종 때 편찬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은 역법의 기원과 성격, 계산법에서 이슬람역법인 회회역법의 원리에 따라 우리나라에 도입, 정착된 과학이었다. 그 외에도 조선 초기에 집중적으로 개발된 과학기기나 의학 분야에서도 당시 중국에 도입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던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과학과 의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흔적들이 있다. 이슬람 문화는 음악, 미술, 도자기(회청(回靑)의 사용과 청화 백자의 제조) 등 예술 분야와 문자(위구르문), 언어(위구르어)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에 폭넓게 전파되었다.

 

 

 

바다를 무대로 한동안 번성했던 이슬람 문화의 한반도 전파는 15세기 이후 중국과 한국의 정치적 변혁으로 장벽에 부딪힌다. 명나라의 건국과 조선왕조의 성립, 새 왕조의 유교사상 강조로 인한 보수 전통주의 채택, 이슬람 해상세력을 제압한 서구 해상세력의 동아시아 진출로 인한 국제정치 질서의 재편과 같은 대내외적 요인에 의해 이슬람 세력은 급격히 퇴조한다. 그 결과 19세기 말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호개방이 있을 때까지 4세기 이상의 긴 단절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해방 이후 미국이라는 새로운 문화의 잣대에 세상을 온통 맞추어가는 반 세기의 긴 문화식민지의 후유증으로 이슬람은 우리에게 가장 생소하고 거추장스러운 전재로 전락해버렸다.

 

 

문화는 섞일수록 풍부하다. 고대 신라와 서아시아의 해로를 통한 문화교류는 매우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새로운 자료 발굴과 새로운 해석을 통해 고대 우리 문화의 원류를 제대로 밝히는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문화의 상호 교류성에 따라 혜초의 대식 진출, 고선지의 서역 경영, 아프라시압 고분도의 신라 사절 등을 중심으로 우리 문화의 서아시아 진출도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해상 실크로드의 젖줄을 타고 전해진 고귀한 문화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뿌리를 가지런히 하는 길만이 앞으로 전개될 21세기 다원화 실크로드 시대에 우리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고 다른 문화를 온몸으로 호흡해 자기화할 수 있는 튼튼한 기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