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이라는 거대 용광로에서 주조된 유럽
'신의 용광로, 유럽을 만든 이슬람 문명, 570∼1215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1215)'
중세 유럽은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충돌이었던 투르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를 단지 기뻐하기만 할 수 있을까.
미국 뉴욕대학의 역사학과 석좌교수인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David Levering Lewis)는 '신의 용광로'에서 유럽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경제, 사회, 문화 측면에서 발전할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한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732년 10월 코르도바(스페인 남부 지역)의 총독 아브드 알 라만과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의 군대가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 지방 사이에서 벌인 것으로, 이 전투에서 카를 마르텔이 승리해 이슬람 문명의 세력 확장을 막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전투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동진해오던 이슬람교로부터 기독교를 구했다는 기존의 주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는 만일 유럽이 당시 선진화된 이슬람 세계 제국에 편입됐으면 유럽인이 13세기에 가서야 겨우 달성할 수 있었던 경제, 과학, 문화의 수준을 3세기나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8세기 무렵의 경제면을 살펴보면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지배하던 알-안달루스 지역(현재 스페인 지역)은 화폐경제가 발전했으나,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은 물물교환 경제에 의존했다.
두 나라 모두 농업에 바탕을 둔 경제 체제였지만 알-안달루스의 농부와 목축업자, 도시는 상업을 통해 서로 발전에 이바지했다. 정부도 경제의 발전으로 세금이라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프랑크 왕국의 도시는 도로망이나 하천 운수로 유지되던 로마 도시의 잔해에 불과해 프랑크 왕국을 지배한 카롤링거 왕조는 경제에서 직접적인 수입을 올리지 못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화 면에서도 차이가 극명해 10세기 말 스페인 남부의 코르도바에는 도서관이 70여 개에 이르고 종이 원고로 된 장서만도 40만 권이 넘었다. 반면 스위스 세인트 갈의 베네딕트 수도원이 소장한 책은 송아지 가죽이나 양피지에 쓰인 600권이 전부였다.
이 같은 앞선 이슬람 문명은 알-안달루스의 기독교인에게 흡수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결국 유럽이 암흑기를 지나 르네상스를 일으킬 수 있었던 지식의 기반을 형성하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바그다드에서 시작한 이슬람 문명이 용광로처럼 비이슬람교도까지 융합하면서 선진 문화, 나아가 오늘날의 유럽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코르도바에 건설한 대모스크(라 메스키타)의 벽에 새겨진 아랍어 문장을 언급하며 알-안달루스로 대변되는 이슬람 문명이 현재의 우리에게 미치는 여파에 대해 다시 조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벌어진 일을 구현하고 뒤에 오는 것을 밝혀주었다."
출처: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235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