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의 투르크 · 이슬람의 영향
-아래의 내용은 이희수 박사의 저서 “한·이슬람 교류사(1991년)”에서 옮겼습니다.-
한반도에서의 투르크 · 이슬람의 영향 (261-262쪽)
투르크 무슬림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이슬람의 영향을 살펴보면, 역사 시대를 통해 비이슬람 종교에 비교적 관대하고 피지배민족에게 수탈 대신 공납을 통해 상대적 권리를 인정해 준 무슬림들은 한국에서도 개인 신앙생활의 차원을 넘어, 이슬람 포교를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시도했다는 증거가 없다. 단지 투르크인 소유 점포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한국인들이 1차적인 영향을 받아 그들 중 일부가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사례는 압둘학누만 소유의 바이칼 양복점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점원 박재성의 개종이다. 그는 주인의 권유로 이슬람을 공부하고 본인의 의사로 1932년에 무슬림이 되었는데, 근대 한국 이슬람사에서 최초의 한국인 무슬림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재성은 <샤밀(Shamil)>이란 교명(敎名)을 얻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투르크인에 의한 이슬람의 소개와 전파는 그들 공동체를 중심으로 미미하게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많은 수의 투르크인들이 거주하던 만주에서는 더욱 활발한 이슬람 전파가 이루어져서 중국인뿐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던 한국인들도 무슬림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1930~1940년대에 만주의 일본상사(商社)에 근무했던 한국인 무슬림 윤두영(尹斗榮), 김진규(金鎭圭)씨 등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투르크인 이슬람 성원이나 청진사(淸眞寺)에 가서 예배를 보던 한국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종한 그들은 한반도의 현대 무슬림 공동체의 형성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약 20~25년간 한반도 전역에 이주, 정착하여 근면과 노력으로 안락한 삶을 영위했던 투르크 무슬림 공동체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와해의 위기를 맞았다. 이는 비호국 일본의 패전과 뒤이은 한국의 독립과 같은 한반도에서의 급격한 정치적 상황 변화에 의해, 생활 근거지를 버리고 또 다른 이주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1945~1950년간에 캐나다, 미국, 호주, 터키 등지로 분산되었다. 그러나 30년간 그들이 한반도에 심어놓은 투르크 문화와 이슬람의 씨앗은 곧이는 한국전쟁 중 같은 동족인 터키 군인들에 의해 새로이 발아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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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내용은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 정수일씨의 저서 “이슬람문명” 347·348쪽에서 옮겼습니다.-
무슬림이 집단적으로 한반도에 이주해 자그마한 공동체를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그들 대부분은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후 망명한 투르크계 사람들로서 만주를 거쳐 일제 치하의 한국에 들어왔다.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그들은 신의주, 혜산, 평양, 흥남, 서울, 천안,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일제의 비호하에 각종 생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서울에 학교와 이슬람 성원을 세우고 경전 ‘꾸란)’을 출간하여 이슬람 교육과 종교의례를 계속 지켜갔다. 심지어 홍제동 부근에는 무슬림 전용묘지도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한반도 광복과 1950년의 전쟁이란 잇따른 충격으로 결국 그 대부분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한편 그들이 경영하는 점포에서 일하던 몇몇 한국인이 그들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현대 한국 무슬림의 비조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이 시기에 만주에서 일본 회사나 기관의 역원으로 있던 한국인들은 그곳에 있는 무슬림과 접촉하면서 이슬람 신앙을 싹틔웠는데, 후일 그들은 한국 무슬림의 초대 지도자 반열에 서게 되었다.
6·25전쟁은 무슬림인 터키군이 참전한 터라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무슬림들이 피를 흘린 전쟁이다. 무슬림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피 흘린 것은 그로부터 약 680년 전 삼별초가 항몽전을 일으켰을 때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항몽군들은 항몽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장수 이백기(李白起)를 체포하여 노상에서 몽골이 파견한 무슬림들과 함께 살해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