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들의 눈에 비친 신라-II
-아래의 내용은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 정수일씨의 “향토와 문화”라는 글에서 옮겼습니다.-
자연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신비의 이상향
중세 아랍 학자들이나 여행자들이 신라와 관련하여 남긴 기록 중에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비롯해 신라의 인문역사와 관계되는 내용도 다수 있다. 그들은 대체로 신라를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시각에서 신라인들의 생활이나 활동을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아랍인들이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으로 동경하면서 그곳에 내왕할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하게 된 데는 신라의 아름다운 자연경색이나 풍족한 지하자원과 함께 신라인들의 유족한 생활상이나 쾌적한 환경이 또한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많은 역사가들이나 지리학자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세심한 필치로 이모저모 묘사하고 있다.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가장 집중적으로 그린 사람은 지리학자 까즈위니(1203~1283)인데, 그는 전대 학자들의 관련 기술을 다음과 같이 집대성하였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무함마드 알 라지는 신라는 살기 좋고 이점이 많으며 금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단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용연향(ambergris)은 향유고래의 장 안에 있는 회색 또는 갈색의 진득거리는 덩어리로서 사향과 흡사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 옛날부터 진귀한 향료로 사용되었다. 집에 물을 뿌리면 이러한 용연향이 풍긴다고 하니, 그 집이 얼마나 깔끔한가를 말해 준다. 까즈위니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에 관한 이 글에서 수려한 자연환경 때문에 육체적 불구자가 없고 위생조건이 좋아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외지 환자가 신라에 오면 숙환이 금새 말끔히 치유되고, 또한 물과 공기가 좋고 기온이 적절해 사막에서 느끼는 그러한 갈증이란 애당초 없다고 말한다. 요컨대 신라인들은 이상향적인 환경 속에서 근심걱정 없이 복된 생활을 누린다는 것이다.
까즈위니는 전대의 저명한 철학자이며 의학자인 라지의 신라 관련 기술을 인용해 신라인의 무구무병한 생활환경에 대한 자신의 지견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슬람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그는 신라의 이와 같은 윤택하고 정갈한 생활환경을 유일신 알라의 시혜로 돌렸다.
아랍 학자들의 기술 중에는 신라인들의 외모나 성격에 관한 묘사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주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질병도 가장 적다.”고 까즈위니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둔 외모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밝히지 않았으나 문맥상으로 보면 외형적인 생김새(얼굴 등)나 모양새(옷차림)를 뜻하는 것 같다. 인종학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무모한 일이지만, 까즈위니가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산명수려하고 무구무병한 환경 속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말로 그 외모가 준수하고 순결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의 함축된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들을 직접 만나 본 사람들의 실감 그대로를 전문에 의해 그가 기록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마끄디시는 신라 주민들의 성격은 양순하다고 하면서, 바로 이것이 외래인들이 신라를 떠나려 하지 않는 원인의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 친절성,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바로 이와 같은 인간성으로 인하여 외래인마저도 향수를 달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윤리도덕을 시사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를 향해 열린 신라의 개방성과 포용성
중세 아랍 문헌에는 아랍인들이 신라에 많이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하였다는 기사가 눈에 띤다. 그들의 신라 내왕에 관한 첫 기술을 남긴 사람은 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지바(820~912)이다. 그는 저서《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중국의 맨 끝 깐수의 맞은편에는 많은 산과 왕국들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신라국이다. 이 나라에는 금이 많으며 무슬림들이 일단 들어가면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고야 만다.”
우편관으로서 내외의 지리에 밝았던 쿠르다지바는 이 책에서 이슬람세계의 교통로와 무역로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면서 멀리 중국이나 한국(신라)까지의 여정도 밝혀놓았다. 그의 뒤를 이은 마스오디도 저서《황금초원과 보석광》에서 아랍인들의 신라 내왕의 실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바다를 따라 중국 다음에는 신라국과 그에 속한 도서를 제외하고는 알려졌거나 기술된 왕국이란 없다. 그곳(신라국)에 간 이라크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윈이 풍부하고 보석이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윗글에서 마스오디는 당시 신라로의 내왕과 정착을 지적하면서 그 내왕자 들로 이라크인(당시 이라크는 수도가 자리한 이슬람제국의 본거지)과 그밖의 외국인들을 지명하였다. 그가 말하는 외국인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가 이슬람제국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각지를 두루 돌아다녔기 때문에 여기서의 외국인이란 그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비(非)아랍인들일 것이다.
아랍인들의 신라 내왕에 관한 이러한 유의 기술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종합해 보면, 첫째로 일찍이 아랍제국(우마위야조)이나 이슬람제국(압바스조, 750~1258) 시기부터 아라비아 반도나 이라크, 그리고 기타 지역으로부터 아랍인들이나 외방인들이 중국을 경유, 그 동쪽에 위치한 신라에 도착하였으며, 둘째로 아랍인들이 신라에 잠시 내왕하거나 여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기간 정착 기거하였으며, 셋째로 그들이 신라에 진출해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정주까지 하게 된 동기와 이유는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좋으며 땅이 기름지고 금을 비롯한 자원이 풍부한 것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는 데 있다.
그러한 내왕자들 가운데서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할 수 있는 것이 설화로 전해 오는 처용이다. 《삼국사기》(1145)에 따르면, 신라 제49대 헌강왕 5년(879) 3월에 왕이 지방을 순유하던 중 개운포(현 울주군 온산면 처용리 일대)에 이르자 난데없이 알지 못하는 4명의 종자가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그 모양이 괴상하고 의관도 다르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산해정령’이라 하였다. 이 책보다 약 400년 후에 씌어진《삼국유사》에는 느닷없이 처용이 동해용의 한 아들로 둔갑하면서 신비와 주술이 함께 한 설화로 윤색 가공되고 처용가니 처용무니 처용탈이니 하는 것들이 선을 보였다. 따라서 처용의 실체를 알아내자면 원초적 사료인《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되돌아가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개운포에 나타난 네 명의 종자는 그 외모나 옷차림으로 보아 분명 신라인들이 접한 바 없는 이방인이다. 그럼 당시 신라 최대의 국제무역항이던 개운포에 나타날 수 있는 외방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무렵 아랍인들은 이미 신라 땅에 내왕하고 심지어 정착까지 하고 있다는 앞에서의 기록을 본다면 이 이방인들을 신라에 온 아랍인들이라고 추정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